천 겹의 바람길, 만 겹의 내면
홍경한(미술평론가)
1. 불가에서는 삶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한다. 사성제(四聖諦) 중 하나로 인간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는 그 고통의 원인으로 헛된 집착(執着)을 꼽는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개의 인간사가 그렇듯 비움과 놓음이 쉽지 않다. 외적 초자아와 내적 자아가 부딪힐 때마다 의도와 달리 머리와 가슴은 따로 놀기 일쑤고, 이성과 감정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그런 상황이 도래하면 나와 너, 우리라는 공동체 내 혹은 관계 내에서의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타자에 대한 깃털 같은 가벼움과 돌덩이 같은 무거움, 경박함과 진중함 사이를 서성이는 나를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존재는 확인 불가능하다. 그저 혼란스럽다. 내일은 좀 나아질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살아 있고, 살고자 한다.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이유이다. 미련 맞도록 예술이란 것에 매달리는 까닭이다.
1인칭으로 썼지만 작가 해 련의 작업은 제 3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동일수렴이 가능하다. 어지러움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새로운 공간을 세우려는 흔적들이 작품 구석구석 곳곳에 산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폐허 같은 집들과 널브러진 가재도구들, 침몰한 배와 시든 꽃은 시각적으로 창백하다. 주인 없는 유모차에선 을씨년스러움과 고독마저 느껴진다. <House Shake> 시리즈(2009)를 비롯해, <Mess>(2009), <Beyond the memories>(2009), <Cruise>(2010), <Just Right>(2010) 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작품들은 도시문명과 그 안에서 살다간/살고 있는 누군가의 삶, 그 지난한 흔적들이 이질적으로 교차한다.
‘부조리감각’으로 명명된 작가 해 련의 이 작품들은 파괴된 질서 위에 걸쳐진 범람의 풍경이자 이식된 풍경에 가깝다. 그것은 리얼하지만 실체적 리얼리티를 충족하진 못한다. 현실의 감각보다 현실을 넘어서는 감각에 치우치며, 사실감을 보여주면서도 결여된 감각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부조리 감각’에 속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기록으로써의 위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 기억과 경험을 밑동으로 한 인식과 사고를 현실 아래 새롭게 선보이는 방법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조각달빛’ 시기인 2012~2016년에 이르면 감각은 침잠하고 풍경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다. ‘부조리 감각’ 시대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설명에 인색하지 않다면, 이때부턴 침묵으로 들어서고 각주는 생략된다. 구상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한 쌍으로 다가오는 <Shroud-Mans>(2012)과 <Shroud-Woman>(2012)은 꽤나 정적이다. 심리적 고요가 녹아 있다. <Stage> 시리즈(2013~2015)를 포함한 <Violet Luna>(2015), <Lunar Halo>(2015), <Playing>(2014) 등의 작품은 보다 내재화한 여운을 준다. 그러면서도 대체로 밝은 조형을 지닌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남들은 집착이라 부를 법한, 하지만 아직 부여잡고 싶은 희망인지도 모른다.
‘조각 달빛’에 있어 몇몇 작품은 조형적으로도 이전과 결을 달리한다. 선명한 윤곽과 화면 분할 방식에서 기하학적 도형을 주축으로 한 추상 회화인 하드 엣지(hard-edge)의 그것과 닮았다. 허나 케네스 놀랜드(Kenneth Noland)나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식의 엄격함은 아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언급했듯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구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이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물은 기원 없는 대상의 환영으로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인 없는 사건처럼 표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나전과 옻칠을 입힌 <The frontier area>(2015), <Boom>(2015), <Blossom>(2015), <Shadow>(2015), <Flying>(2015~2016) 연작에서도 비등하게 나타난다. 여기서의 풍경 역시 유화나 아크릴로 그린 작품들처럼 외적 묘사에서 내면의 기술(記述)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사의 몫’으로 분류된 2017~2018년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둡다는 인상부터 심어준다. 도시를 벗어나 구체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속도감을 유지한 채 허무감, 상실감 등과 버무려진 채 야단스럽게 그려진다. <눈 오는 날>(2017), <바람 부는 날>(2017), <비 오는 날>처럼 제목마저 지시성이 강하다.
눈길을 끄는 건 자유로운 선과 유리 조각 같은 예리함을 동반한 면이 교차하고, 거리감을 따라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공유하는 양태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형식적으론 ‘조각 달빛’의 일부를 재인용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래 진행된 <Angel’s Share> 연작(2017~2018)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내용상 어딘가 되돌릴 수 없는 혹은 치유하기 쉽지 않은 상실의 장막은 유효하다.
3. 상실의 장막은 툭툭 내던진 듯한 붓질, 배경에 올곧이 밴 감정과 꽤나 이성적인 도형이 불규칙하게 또는 불안정하게 공존하는 화면에서 이미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조각 달빛’과는 다르게 범위와 경계를 한껏 흐트러트린 채 안정적인 평화로움이 어떤 에너지에 의해 폭발하는 장면은 하나의 그림에서 다층적인 감각을 전유케 만드는 원인이다. 더불어 생(生)과 사(死)라는 사유의 플롯(plot)을 외면하기 어렵다.
흥미로운 건 ‘천사의 몫’에 이르면서 매체확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작가는 캔버스 작업과 설치작업을 병행한다. 과거에도 옻칠이 사용된 경우가 있고, 설치, 평면을 오가며 재료의 다양성을 열람케 한바 있지만, 이때부턴 ‘레디메이드’(Ready-made)가 등장한다. 이미 죽음을 앞둔 나무에 묻은 나프탈렌(naphthalene)이 그 예이다.
나프탈렌은 고체에서 액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변화하는 승화성 물질이다. 벤젠고리 두 개가 이어진 방향족 탄화수소 화합물로, 흔히 방향제나 탈취제로 쓰인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재료 중 하필 방향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를 덮기 위함이다. 덮는다는 건 방어이며 치유(治癒)의 의미도 있다. 치유를 소환하는 건 삶(현실)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해 련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 혹은 그것을 주는 능력을 가진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프탈렌은 일종의 삶과 죽음이라는 세계의 정화작용을 위한 매개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제 아무리 좋은 방향제를 사용한들 근본적인 악취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와인 숙성 과정에서 사용한다는 ‘Angel’s Share’를 차용하며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다독이는 과정에 머문다. 어쩌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응급처방이라 해도 무방하다.
4. 공교롭게도 2018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천 겹의 바람길’에선 비현실적이고 환영적이면서도 조화로운 혼돈스러움을 다시 만나게 된다.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2018), 체념과 허무가 배어 있는 <푸른 물결>(2018),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공허한 외침을 담은 듯한 <숲속의 메아리>(2018), 삶의 연속성을 빗댄 <끝나지 않는 풍경>(2018), 여정의 쓸쓸함을 적셔낸 <겨울자리>(2019)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아직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넘어야할 것이 많은 갈등과 번민이 투영된 <천개의 고지>(2019), 이루지 못할 꿈-부질없는 몸짓임을 알면서도 실천해야 하는 심정을 붓으로 적은 <이카루스>(2019), 바람과 눈과 비와 이슬과 먼지와 햇살이 뒤엉킨 나날을 은유하는 <폭풍 속으로>(2019) 등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에는 초월함으로써 모든 것을 감싸는 <공과 공 사이>(2020) 시리즈로 종결되지만, 사회적 관계 내에서 작가의 위치와 현실을 반영한 전례는 계속된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만 겹의 내면은 ‘천 겹의 바람길’로 흐르고 흐른다.
해 련에게 풍경은 삶의 배경이다. 배경 내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내면과 심리의 현실이다. 현실은 삶과 죽음이 함께 서성이는 공간이고 작품은 그것의 전사(傳寫)이다. 나아가 그에게 작품은 온전히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할 수도 있는)장(場)이다.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무대를 이탈하려는 몸짓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소리를 옮기기 위한 모노-극장(mono-theater)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획자이자 출연, 방백(aside)의 원형은 작가 자신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조형언어적 확언을 포함한 이미지, 감각적인 모든 것을 시원적 동일자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회화에서 확인 가능하다. 수없이 가로지르는 선(色線)들은 흡사 사회적 관계 속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양태를 포박하듯 비춰지고, 부재의 대체제로서 자리하는 어둡고 짙은 숲은 도달하지 못한 세계인 냥 존재의 불안을 빨아들인다. 특히 처음부터 줄곧 똬리 튼 기하학적 전개는 그 세계가 결코 박제된 그림 속 이미지만은 아님을 우회하지 않는다.
작가는 회화와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작가노트에 적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회화의 세계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구축되었고 분화되는 과정 속에서 해체되는 미술의 역사가 있어왔다. 외적발생과내적반응으로 인해 이러한 순간들을 만나는 감각의 여정에서 느낌을 구체화하는 언어가 솟아났다. 미세하게 분리된 감각의 진화 속에서도 전체적 결합이 있었다. 나의 의식은 이 소리들을 함께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해체는 또 다시 뼈를 세우고 살을 붙이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내가 마주했던 자연의 풍경은 붓을 통해 이와 같은 통로를 거치고 언어가 가지는 힘에 끌려 하나의 장으로 마무리 된다.”
조금은 다른 해석일 수 있으나 필자는 그의 회화를 통해 의식 속에서 무의식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본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의식의 단락을 좆는 실제와 그림자를 마주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에게 회화는 쫓고 쫒기는 장소이며, 조금 더 덜어내기 위한 가중의 창(窓)이다.
5. 우리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자체가 시원을 파악하기 힘든 시뮬라크르(simulacre) 일뿐더러, 그렇게 고통 받는 존재로 숙명 지어졌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힘들어하지 않을 수는 있다. 흔히들 현실을 수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결국 마음에 달렸다. 예술이 그렇듯 모든 시작은 그곳에서부터 나온다.
한편 첨언하고 싶은 건 매체의 다양성에서 거리를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설치에서 페인팅으로의 전환내지는 병행도 유의미하나, 매체실험의 유효성을 스스로 입증할수록 작업의 층위도 달라질 수 있다. 꾸준히 그 길을 모색하는 것도 향후 작업밀도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인터뷰에서 밝힌 회화론을 포박하며 천 겹의 바람길, 만 겹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도 틀림없다.■